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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방랑이여

수다공작소 2009. 10. 10. 18:39

 

우리 고전에는 알게 모르게 진한 한의 정서와 삶에 대한 지독한 고찰이 자주 등장한다. 반면에 요즘 문학은 어떤가? 설익은 감자를 우직우직 씹어먹는 느낌이랄까, 아무튼지간에 그들은 파편화된 지식들을 엉성하게 조합하느라 바쁘다.

 

p83 "그러나 아무리 애정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개체가 부부라는 틀 안에서 이혼하지 않는 한 한 영원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자전적 느낌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대가족'과 '핵가족'이란 시대착오적 만남을 '결혼'이란 인생중대사로 접붙이기를 시도한다. 핵가족의 일원으로 그마저 외동아들로 자라 누구보다도 개인주의적인 '다이조'씨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가족의 막내로서 지독히도 공동체성을 '가논'과 동거한다는 설정. 처음부터 심상찮다.

 

   단행본 3권을 출간했다지만 아직 출세작이랄 것도 없어 그닥 생계가 넉넉할리 없는 다이조. 아버지의 전근으로 어려서부터 이곳저곳에 살다보니 그에게 있어 친척은 명절 때마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그가 이제 막 여배우로서 인정받을 찰나에 서있는 가논과 사귄다는 것은 누가봐도 우려할만한 일이다. 가논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치코란 모계로 똘똘뭉친 '구라하라'집안의 성깔있는 막내딸이다.

 

구라하라! 이 책에서 구라하라는 대가족의 전형이며, 주인공 다이조에게 있어서는 갈등의 대상이자, 이해하고 수용해야만하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결혼과 함께 데릴사위로 전락해버리는 그에게 있어 어쩌면 구라하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위압적인 존재였을지 모른다.

 

p 46 "대가족이라 해도 역시 하나의 작은 사회이고, 그 안에서 누구와 같은 편이 되어 누구의 비호 아래 살아갈 것인가를 빨리 파악하는 것은 승리의 주요 요인인 것이다."

 

p49 "아무리 내 가족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 당연히 마음이 맞지 않는 인간이 두셋 정도는 나오는 법이다. 그러나 바깥세상에서야 싫은 사람은 안보면 그만이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여서, 아무리 싫어도 끝까지 이어져야 하는 이 관계의 복잡함과 난해함이야 말로 이와 같은 집단의 최고 문제인 것이다."

 

   핵가족의 일원으로 살았다는 것은 결국 사회성이 다소 떨어질 수 있단 이야긴가? 거대한 집단만이 선사할 수 있는 복잡힘과 난해함에 대해서 그들은 그저 구조적으로 문외한이었다. 어쩌면 약육강식의 사회 속에서 그들은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p50 "순간 예상치도 못한 케이스케의 발언이 있었지만 이는 나를 구원해 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이다. 이 남자는 적이라고도 동지라고도 말한 수 없는 수장쩍은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으스스한 존재였다."

 

   인간은 가끔 애매모호한 상황을 즐긴다. 예전이라면 흑백을 분명히 가리는 게 이로웠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은 다르다. 워낙 많은 섬들이 존재하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너무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흑백을 가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만약 그들이 오징어와 같은 연체동물이었다면 이곳저곳에 발을 담그고 있던지 아니면 시시각각 몸의 색깔을 바꿔댔을거다.

 

p103 "오늘부터 나는 구라하라 다이조인 것이다."

P112 "삼십 년간 익숙해 있던 성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은 뭐라 표현할 길 없는 기묘한 사태였고 한없이 쓸쓸한 무엇가가 있었다."

P116 "너무해. 좁은 방이라니. 여기는 우리 엄마가 한평생 고생해서 손에 넣은 집이야. 공짜로 살고 있는 주제에 좁다니 뭐니 하고 불평하면 벌 받을 걸!"

P117 "여자는 변한다 결국 그 사실은 어마어마한 생활의 변화로 향한다는 느낌이 들면서 나는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P120 "한심한 이모부"

P147 "한편으로 결혼한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살고 있었다."

 

    인생의 쓰디쓴 맛을 다 알아버린 것처럼 살아가는 애늙은이 초등학교 리키야. 남성우월주의 사회에 염증이라도 난듯 어느날 갑자기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아온 고나츠. 그런 고나츠에게 나타난 콜롬비아 출신의 트렌스젠더 남자친구.

 

    소설은 결국 다이조가 구라하라의 진정한 가족이 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P384 "가족들의 품안에서 잠드는 포근함은 우주에서 부유하는 흔들림과 비슷하다.", "장인은 '아들아' 하고 중얼거렸다.

 

   결말에 다이조가 꿈을 꾸면서 가논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이 구라하라 가족의 품에 편입됨을 느낀다. 가벼운 일상을 엮어낸듯 보이지만 실제로 이 소설은 핵가족과 대가족이라는 그 주제를 관통한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찾아가는, 어떤 면에서는 성장소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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